대한난민 정착기, 이웃이 될 수 있을까

지하 강당에는 대형 태극기와 비아프라화살표 국기가 나란히 걸려 있다. 그 가운데 연단에 선 킹데이비드 IPOB화살표 한국지부 대표가 환한 미소와 함께 우렁차게 “IPOB!”라고 외친다. 함께 모인 이들은 “One Family(한 가족)!”로 화답한다.

비아프라 공화국은 1967년 나이지리아 남동부에서 그리스도교를 믿는 소수 민족 이보족이 분리 독립해 세운 나라다. 독립 후 3년간 나이지리아 정부와의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 패배해 이름을 잃었다. 그 과정에서 비아프라인 수백만 명이 나이지리아 정권을 쥔 하우사족에게 살해당했다.
IPOB(Indiginous People of Biafra)은 비아프라 공동체 결사단체를 의미한다.
외국인들이 모여있다.

나이지리아 국기와 비아프라 국기를 달고 있는 두 인물이 엎치락뒤치락 씨름 경기를 하고 있다. 치열한 공방 끝에 비아프라 선수가 승리를 거둔다. 패자인 나이지리아 선수는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뒤로 나자빠진다.

IPOB가 개최한 ‘영웅의 날’ 행사 때마다 선보이는 전통춤 공연의 한 장면이다. 실제 역사는 비아프라의 패배지만, 무대에서만큼은 비아프라의 승리다. 관객들 사이에선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외국인들이 모여있다.

IPOB는 매년 비아프라가 독립을 선포한 1976년 5월 30일을 기념하며, 이 날을 즈음해 서울과 동두천 등지에서 ‘영웅의 날’ 행사를 개최한다. 행사 자금은 회원들이 매달 5만 원씩 내는 회비로 충당한다.

회비는 일부를 제하고는 독일에 있는 IPOB 본부로 보낸다. 본부에서는 운영비로 쓰고 남은 돈으로 구호물품을 사서 나이지리아 내 옛 비아프라 땅인 이보랜드(Igbo Land)로 보낸다. 여전히 그곳에서 생활하는 동족들은 나이지리아 정부의 차별과 박해를 견뎌내고 있다.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대부분 극빈자 층에 속한다. 킹데이비드는 “한국에서 헌 옷을 모아 고향 이보랜드로 보낸다”고 말했다. 그는 무거운 목소리로 “옷 한 벌 사 입는 것조차 비아프라에선 힘든 일”이라며 안타까워 했다.

킹데이비드

킹데이비드는 2003년 전 재산을 털어 한국에 왔다. 그리고 17년 만인 2020년 대한난민이 됐다. 나이지리아에 살던 그의 남동생은 2017년 정부에 끌려가 며칠 동안 고문을 당했다. 고문관들은 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동생을 풀어줬다. 하지만 이미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동생은 풀려난 지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다. 동생은 킹데이비드에게 형이 한국에서 독립운동하는 걸 정부가 다 알고 있다며 “여기 오면 형은 죽는 거야”라는 유언을 남겼다. 언젠간 고국으로 돌아갈 꿈을 꿨던 그는 2018년 대한민국에서 난민 신청을 했다.

거리를 걷고 있는 킹데이비드

그 역시도 여느 난민처럼 대한난민으로 인정받기까지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지내면서 소송에 소송을 거듭했다. 그 과정에서 힘이 돼 준건 공익법센터 ‘어필’과 천주교 의정부교구 ‘동두천 엑소더스’였다. 킹데이비드는 “한국은 우리를 받아준 제2의 고향이자 보금자리”라고 했다.

난민인정이 받아들여졌다는 소식을 듣자마다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함께 동두천성당에 가서 감사 기도를 올렸어요.
이건 정말 기적이었어요.

단체사진을 찍고 있는 아프리카 출신 이주민

IPOB는 나이지리아, 라이베리아 등 영어권 아프리카 출신 이주민이 많이 사는 경기도 동두천 보산동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IPOB는 동두천 지역 사회와도 활발히 교류하며 지내고 있다. 2020년 5월 어버이날에는 동네 어르신을 위해 삼계탕 300인분을 대접했다. 거동이 불편한 홀몸 어르신 집을 찾아 청소 봉사도 해 왔다. 코로나19 때에는 손 세정제 360개를 구입해 동두천시청에 기부했다. 단체 헌혈에도 나섰다. 킹데이비드는 “‘좋은 시민이 되자’가 IPOB의 강령”이라고 설명했다. 자신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비아프라를 대표한다는 생각에서다.

동두천에는 비아프라 외에도 아프리카 공동체가 두 곳 더 있다. 한 곳은 서부 아프리카 국가 출신이 모인 결성한 ‘동두천 공동체’. 다른 한 곳은 동부 아프리카 국가 출신으로 이뤄진 ‘이타다’이다. 낯선 땅에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난민과 이주민은 같은 고향의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에서 많은 도움을 얻는다. 공동체는 곧 가족이나 다름이 없다. 이와 함께 한국인 이웃,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사회와 소통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천주교 의정부교구 엑소더스 강슬기 활동가는 “난민들은 공동체를 이루며 한국 사회에 동화되고 공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센터만이 난민의 유일한 동아줄

‘제주 라(羅)’씨 성을 가진 청년 라연우는 박해를 피해 고향인 시리아를 떠나 한국에 왔다. 그는 더이상 난민이 아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아메드 라바비디. 귀화에 성공해 한국 이름을 얻고 어엿한 한국인이 됐다. 지난 6월 전국동시지방선거 때 그는 한국인으로서 투표에 참여했다. 그의 일터는 나오미센터다. 천주교 제주교구 이주사목위원회가 운영하는 이주민 센터로, 2018년 예멘 난민 500여 명이 제주로 들어왔을 때 정착을 도운 곳이다.

‘제주 라(羅)’씨 성을 가진 청년 라연우

오후가 되자 나오미센터는 아이들로 북적였다. 예멘부터 수단공화국까지 국적도 다양하다. 아이들은 연우를 친형처럼 따르며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연우는 아이들을 센터 2층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난민을 비롯한 이주민 2세들을 위해 운영하는 공부방이 위치한 곳이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공부하고. 친구들과 간식을 나눠 먹으며 보드게임을 한다. 난민 아이들의 ‘사랑방’인 셈이다.

나오미센터의 아이들

이날 모인 난민 아이들 중 난민 인정자는 수단공화국 출신의 육 남매뿐이다. 육 남매의 아버지이자 제주의 유일한 난민 인정자 가정의 아버지 알리(48)는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양계장에서 일한다. 하교 후 아이들을 돌봐주는 나오미센터 덕분에 생계에 집중할 수 있다. 2013년 안산에 살다 우연히 제주도로 오게 된 알리 가족에게 센터 없는 정착은 상상하기 어렵다. 나오미센터 김상훈 사무국장은 “제주에는 육지처럼 난민 공동체가 없다”고 했다. 제주에 정착했더라도 일자리를 찾아 육지로 나가는 이들이 대부분이어서다. 육지에 있다 제주로 온 알리의 경우는 드문 케이스다.

운전중인 알리와 가족들

알리가 가진 한국에 대한 첫인상은 ‘추운 나라’다. 알리는 두툼한 점퍼도 한 장 없이 한국을 찾았다. 기본적인 기후도 모르고 밟은 나라의 언어를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알리 가족의 손을 잡아준 것은 나오미센터였다. 센터는 어딜 가나 필요했던 통역과 번역을 도와줬고, 의료 서비스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국가 시스템이나 난민 공동체 도움을 받기 어려운 상황에선 이처럼 민간단체의 역할 커질 수밖에 없다. 나오미센터는 주거와 일자리 문제에도 발 벗고 나서고 있다. 센터는 주택을 직접 임대해 난민에게 제공한다. 당장 집세가 없는 이들을 위해서는 보증금과 한두 달 월세를 대신 내준다. 난민이 취업을 하면 센터는 그 돈을 돌려받는다. 이런 선순환을 위해 센터는 지역 사업가와 단체장들을 설득해 난민 일자리를 늘리고 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는 알리와 가족들

입도부터 정착까지 동행하는 나오미센터는 난민들에게 제2의 고향이자 집이다. 김상훈 사무국장은 “난민은 도움을 받으러 온 사람이 아니라 이곳에 살려고 온 사람들”이라고 강조했다. 더 잘살아 보고자 전국 각지로 떠난 난민들도 힘들 땐 나오미센터를 찾는다.

“육지로 갔다 다시 제주로 오는 난민들은 꼭 센터에 들러요. ‘어쩐 일이야’하면 ‘그냥 왔다’고 말해요. 그럼 제가 ‘힘들구나!’ 물으면, 그 친구들 또 씩 웃으면서 말해요. ‘힘드니까 집에 왔죠’라고.”

시혜 대상에서 이웃집 난민으로

난민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환대한다면, 난민을 단순히 돌봄의 존재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 돌봄 대상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이웃으로 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난민과 한국인이 자주 만나 서로를 알아가야 한다. 한국인은 난민을 너무 모르는 게 현실이다.

천주교 의정부교구의 난민 지원 사업은 난민이 지역 사회에 잘 녹아들 수 있도록 돕는 모범사례다. 의정부교구는 2018년부터 ‘1본당 1난민 가정 돌봄사업’을 시작했다. 한 본당에서 자원한 한국인 2~3명이 한 팀을 이뤄 난민 가정과 연을 맺고 교류하는 활동이다. 난민 활동가들은 난민 아동의 학습을 지원하고, 난민 가족 누군가 아프면 병원에 함께 가주고 반찬을 나누기도 한다.

이순희 난민 활동가는 난민을 “이웃집 동생들”이라고 소개했다. 이순희 활동가는 교구에서 ‘난민 활동가 교육’을 받고 2년 전부터 난민 가정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에티오피아에서 온 부부가 그의 이웃이다. 이 활동가는 한 달에 한 번씩 그들의 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사는 얘기를 나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대화가 안 통했는데, 이젠 한국어 공부도 같이 하면서 수다 떨고 있어요.

처음에는 성당에서 나오는 후원금으로 음식과 생필품을 사서 방문했다. 난민은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더 후한 대접을 하는 건 난민 가정이었다. 이 활동가는 “에디오피아 커피와 빵이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다”며 “집에 놀러갈 때마다 부부가 먼저 따뜻하게 안아준다”고 말했다.

손을 잡고 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난민과 교류하는 시간이 늘어나자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제야 난민들도 허심탄회하게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일터에서 겪는 어려움부터 고향에 대한 그리움까지. 이 활동가는 “난민을 만나고 이해할 기회는 흔하지 않은데 이웃이 돼서 너무 좋다”고 말했다.

2019년부터 나이지리아 난민 가정과 교류하고 있는 이용성 난민 활동가는 “1본당 1난민 사업에 참여하면서 난민 문제가 더욱 피부에 와 닿았다”고 말했다. 평소 업무상 국제분쟁을 주의 깊게 지켜보면서 난민과 이주민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 그들의 삶이 어떤지는 정작 가까이 들여다보지 못했다. 이용성 활동가는 난민과 함께 지내면서 우리 사회가 이방인에게 투영하는 이미지가 잘못됐음을 깨닫게 됐다고 했다.

난민과 이주민이 우리 국민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오해가 크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들은 한국 사람이 피하는 고되고 험한 일을 하고 있거든요. 일자리를 빼앗는 게 아니라 한국인으로 대체하기 어려운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용성 활동가는 난민 가정이 마주한 현실적인 문제를 직접 해결해주지는 못해도 친구가 돼 기도해주고 있다. 난민의 통합을 돕는 가까운 이웃이 된 셈이다.

아이들이 뛰고 있다.

천주교 의정부교구의 ‘1본당 1난민 가정 돌봄사업’은 그동안 100명이 넘는 활동가를 배출했다. 함께한 난민 가정만 47곳이다.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난민과 한국인이 이웃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먼저 다가가 만나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슬라이드이웃이 될 수 있을까
난민 인정자인 오마르가 집 마당에서 빨래를 널고 있다.
오마르가 아끼는 신발을 옷장에서 꺼내 보여주고 있다.
비아프라 공동체 회원이 ‘영웅의 날’ 행사를 보고 있다.
비아프라 공동체의 ‘영웅의 날’ 행사.
비아프라 공동체 회원들.
샤이마, 칼리드 부부와 딸 노라이가 동네를 산책하고 있다.
알리, 카디자 부부는 고향과 비슷한 모습인 제주에 정착했다.
알리의 막내아들 와슬이 한국 아이와 공놀이를 하고 있다.
알리, 카디자 부부가 집 앞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있다.
알리의 자녀들이 제주 이호테우 해변에서 뛰어놀고 있다.
해변을 걷는 알리, 카디자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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